박정희 일가에 대한 이야기 ( 박성빈, 박정희, 박상희 ) - 박정희 가계도 설명

잘 몰랐던 이야기가 있어 일단 박제하고 편집합니다.

[ 박정희 가계도 ]

선 3줄요약을 하면

1. 박정희의 아버지(박성빈)와 작은형(박상희) 는 항일 독립운동가

2. 정작 박정희는 일본정부에 혈서쓰고 충성맹세 해서 일본 육사들어간 진성 친일파

3. 박정희는 정의를 부르짖다 몰락하는 일가를 두눈으로 목격하긴 했지만, 

   어쨋든 본질은 입신양명을 우선시 했던 기회주의자

Ps. 김일성의 아버지도 반공주의자였음. 아이러니한 사실.

Ps2. 괴물이 만들어 졌던 과정... 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음.


1.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과의 이야기

박성빈은 1871년 생입니다. 형제는 삼형제고, 박성빈은 장남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박영규(박정희의 할아버지)는 경북 성주 지역에서 농지를 꽤나 소유한 부농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박성빈은 20세 이전까지는 넉넉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박성빈은 과거를 보기 위해서 자주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박성빈은 무과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아시겠지만 과거라는게 순조 재위기 세도정치 시작되면서 요식행위로 변질되었습니다. 

세도가문 가족이거나 세도 가문에 뇌물 바치는 자들을 미리 합격시켜놓고 시험만 치르는 그런 구조였고 세도정치가 끝나고 나서도 그런 구조는 유지되었습니다. 

뭐 고종과 명성황후가 통치자금 마련한다고 매관매직을 직접한다는 것을 외국인들까지 알고 깠을 정도이니 말다했죠.

박성빈 역시도 그런 이유로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며, 돈을 탕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 합격이되었는지 박정희의 기억에의하면 효력부위라고하는 종9품 무관직을 얻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하사관 정도되는 미관말직입니다. 

박정희장편 전기문을 쓴 조갑제 의견에 의하면 무과 초시만 붙고 복시는 떨어진거 아니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받았다는 효력부위란 관직은 뭐가 되는지는 알 수없습니다. 박정희의 기억이 잘 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박성빈이 효력부위 관직에 제수된것을 사실로 치는 분위기입니다. 뭐 워낙 말단관직이라 진위여부에 별로 의미를 두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박정희와 박정희 집안내지 고향 사람들 증언에의하면 박성빈은 벼슬을 받았지만 실제로 임명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뭐 또 거기에도 뇌물이 필요했는지 전임자가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기에 열받은 박성빈은 부정부패한 세상에 크게 실망하고 동학교도가 되고, 동학운동기의에도 참여합니다. 왠지 김구 주석하고 비슷한 경로로 동학에 발을 들이게 되는 거죠.

오히려 동학진압에 공을 세워서 벼슬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동학운동기념단체 조사에의하면 박성빈은 동학에 가담한게 맞고, 심지어 성주지역 접주였다고 합니다. 접주라니까 성주지역 총책임자인겁니다. 그가 경상도 성주에서 농민기의전쟁에 가담했으므로 아마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이유로 일어난 2차 궐기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1차 궐기는 호남중심이니까요.

그러나 동학혁명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서 와해되고 박성빈 역시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풀려났다고 합니다. 뭐 말을 잘해서 풀려났다고하는데 접주씩이나 된 사람이 단순히 말로 자기 변호를 엄청 잘해서 풀려났을 것 같지는 않고 집안에서 돈좀 썼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박성빈의 신세가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집안에서는 그를 벼슬한다고 가산 탕진하고, 동학에 가담해서 집안 말아먹을뻔한 애물단지,천덕꾸러기로 치부하고 아예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박성빈은 장남인데도 불구하고 재산을 한푼도 물려받지 못했고 모든 재산은 동생인 박일빈이 차지했고 박성빈은 처가인 수원 백씨 집성촌에서 논 8마지기를 소작하고, 처가 선산 산지기를 하는 소작농신세로 전락합니다.

박성빈처럼 과거를 보면서 사회 부정부패현실을 목도하고, 해주 접주로서 동학기의에 참여했던 백범 선생은 실패 끝에도 애국 운동을 지속하고 결국 독립운동가, 민족지도자가 되었습니다만, 박성빈은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를보고 관직을 얻으면서 경험한 사회의 부정부패, 청군과 일본군 끌어들여다 제 나라 백성들 해충잡듯이 죽이는 정부, 나라를 노리는 강대국들, 도탄에 빠진 국민들...하여간 엉망진창 초막장 시대의 어려움과 더러움을 모두 경험한 박성빈은 사회와 세상을 포기합니다.

박성빈의 묘비나 박정희의 회고록 나의 소년시절에보면 박성빈은 썩고 부패한 나라와 현실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오직 책과 술, 시조 짓기만 몰두하며 살았다고 썼습니다. 소작부치는 농사일은 아내인 백남의가 맡아서 했고 좀 후에는 장남 박동희와 차남 박무희가 했다고 합니다. 살림이 가난해서 백남의가 시동생 박일빈에게 돈이나 식량을 꾸러 다니거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죠. 냉대와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박정희의 가족, 고향 이웃의 증언에의하면 박성빈은 늘 술을 마시고 시조 짓는 것이나 업으로하는 한량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키가 컸는지 아버지 키는 큰데 박정희는 작아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던 박정희 초등학교 동창의 증언도 있고 박성빈의 별명은 선달(무과 합격하고 보직 못받는 사람) 영감이었으며, 동네에서 꽤 무섭고 한 성격하는 노인장으로 통했다고 합니다.

뭐 동학접주까지 해본 사람이니 보통 성격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정희는 아버지 박성빈하고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의 글을보면 엄마 백남의에대해서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느껴지지만 아버지에대한 서술은 매우 단편적이고 표면적이며, 주위에서 들은 사실만 쓰고 있다고합니다. 

주로 동네에서 술 잘마시는 좀 성격 강한 할배 정도로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에의하면 박정희는 권위적이기만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하면서 엄마하고 자식들 고생시키는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그 실망감으로인해서, 

남자들이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바람직하고 본받을만한 아버지의 존재를 상실했을 거라고 합니다. 

이것이 박정희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도 합니다.

참 흥미로운게 박정희의 아버지와 셋째형은 모두 항일을 했는데 박정희는 일본군장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세상 바로잡아보겠다고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 본전도 못찾고 가난한 소작농이 된 아버지, 더러운 세상 일본놈들이 설치는 세상 이런 세상은 버리고 숨어서 살자, 그 옛날 현인들이 세상이 쓰레기같을 때는 숨어서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듯이 나도 그렇게 은둔하며 살리라하며 몰락을 자초한 아버지, 술마시고 시나 지으면서 엄마하고 형누나 고생시키는 아버지...

어쩌면 자신은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도 합니다. 그것이 박정희로 하여금 힘(power)대한 강한 지향의식을 가지게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뭐 그런 분석을 하는 심리전문가들도 있고 말입니다.



2. 박정희와 작은형인 박상희와의 이야기

아시는분은 아시겠지만 박정희는 한때 남로당에 몸담았었고, 그래서  대선때 색깔시비로 고생을 좀 했었으며, 지금도 남로당 빨간색이라고 놀림받기도합니다.

그리고 흔히 박정희를 남로당의길로 안내한 것이 셋째형 박상희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박상희가 박정희 어렸을때 아주 잘해줬다고 합니다.

그도그럴것이 첫째형 박동희와 둘째형 박무희는 나이가 박정희와 스무살 이상 차이가났던데다, 

농사일에 바빠서 박정희를 그다지 챙길 여력도없었죠.

바로 위에 형인 박한희(박한생이란 예명도있음)는 정신지체장애인이었던데다 20살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형제들 중에서 학력이 가장 좋은 축에든것이 박상희,박정희였다고 합니다.박정희가 사범학교진학하는데는 박상희의 원조가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이 나 죽기전에 막내녀석 장가보내야 한다고 그래서 박정희가 싫다는데도 19살의 나이에 김호남과 억지로 혼인을 치루죠.

박정희는 내심 박상희가 자기편들기를원했지만 박상희는 아버지한테 효도해라 자슥아 하며 아버지편을 들었고, 이후에도 박정희가 아내 김호남과 장녀 박재옥을 홀대하자 가장 노릇제대로 안 한다고 방에 가두고 몽둥이로 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간에 더 사이가 벌어질 일이 생겼으니...바로 박정희의 만주행이었습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온 식구가 반대했는데 특히 박상희의 분노는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박싱희는 신간회 회원이기도했고 동아일보 구미지부장을하며 항일운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좌익계였지요.

그로인해서 일본 경찰에잡혀서 감빵도 여러차례 다녀왔다고 합니다.

나름 독립운동가였던 박상희입장에서는 동생 녀석이 일본군 군발이짓하러 간다니 분노할 수밖에없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누나의 증언을 들어보면 박정희가 박상희한테 나 만주군관학교들어가게 돈 좀 달라고했더니 호통을치며 혼내서 도망쳐나왔다.

누나가 그 돈좀 주면 안 되겠냐해서 결국 누나 돈 받아다 만주가고 일본 육사를 갔다고합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패잔병꼴로 돌아온 박정희를 박상희는 심하게 혼을 냈다고합니다.

교사질이나 잘하지 말 안 듣고 일본놈 군발이 노릇하러 가더니 땅끄지가되서 돌아왔다고..


여담으로 박정희 제자들에의하면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좋은 교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인 교장,교감과 동료교사들과의 갈등과 차별대우에 배알이 뒤틀려있었고,

이것이 그의 '일본군 장교가되겠다'는 열망의 원인이되었습니다. 

저 인간들 빌빌 기게 만드는 방법은 그거밖에 없다 이거죠. 꿈은 이뤘다고합니다.

장교되서 도중에 구미와서 일본인 교장,교감,교사 빌빌 기게 만들었죠.

박정희는 복수해서 좋았을지 모르나, 독립운동하던 박상희는 일본군 군발이가되었던 박정희를 경멸했습니다.

박정희가 돌아와서 누나집에서 숙식했는데 바로 옆집인데도 꽤 오랜동안 보러오지도 안하았고 말도 못걸게 했다고합니다.

시간이 자나서 좀 풀렸는지 정치토론을하기도했는데 여기서도 엇나갔다고 하죠.

박상희는 여운형을 지지하고 이승만을 비판했지만 박정희가 이승만 역성을 들어서 심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러다 10월 대구 봉기가 터졌고 이때 박상희가 꽤 깊이 개입했는데 경찰들 패죽인다고 군중들이 난리를 치니까,

박상희가 

"너거들이나 경찰들이나 다 같은 조선인들인데 죽이겠다고?"

"경찰들한데 손대지마라. 손대는 녀석은 내가 가만 안 둔다." 고 보호하면서 중재에 나섰다가..

지원나온 충청도 경찰들 총에 맞아서 죽습니다. ( 논 위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


박정희가 남로당 들어간 동기가 형에대한 복수였지만,

들켜서 고문당하고 결국 조직다 자백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후로 박정희는 형에대해서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단지 박정희 자서전 쓸 때 작가가 "형님이신 박상희씨가 꽤 수재였나 봅니다" 하니까 

박정희가 시큰둥하게 "대구 사범도 떨어졌는데 수재는 뭔 수재야."라고만 했다고 합니다.박상희의 사위가 김종필이죠.

동생때문에 묻히는 경우지만 박상희가 대구 경북에서는 꽤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서는 여운형은 몰라도 박상희는 알았다고 합니다.

얼마 없는 기록과 증언으로 유추해보건대 꽤 카리스마있고 친화력이있던 인물로 보입니다.

나름 정의감도 있었고, 활동도 많이 참여한걸보면 적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말이없고 교우관계가 좁고 냉정한 성격의 박정희하고도 성격이 다소 달랐던 것 같습니다.

한 명은 독립운동가,반체제 좌익활동가로 한 명은 일본 장교,한국군장교,대통령까지되었던 형제의 다른 인생이죠.


최후는 둘다 총맞아서 타살되었으니 엇비슷하긴 하지만,

박상희는 운동하다 야외에서 죽었고,

박정희는 딸 뻘되는 여자들 끼고 연회중에 부하 총에 의해 안전가옥에서 죽은 차이는 있습니다.

원문링크 1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6980&s_no=12666380&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72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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