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작전통제권, 우리나라는? - (2) 현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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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9 - [역사/근현대사] - 전시작전통제권, 우리나라는? - (1) 전작권 이양 배경



이번에는 4줄 요약 있습니다. 길어요 ㅜㅜ




저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전시작전통제권, 아니 작전통제권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계기는 바로 '현리 전투'입니다.


윗 그림에 나와 있는 대화는 아직까지도 돌아다니는 유명한 일화죠.


결국은 빡친 UN군부는 


한국군 3군단을 해체하고 육군 본부의 작전권도 폐지한다. 육군본부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사 훈련에만 국한한다. 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직접 받아야 하고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

-1951년 5월 25일 강릉비행장 육군지휘본부에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라고 통보를 내리는 것으로 작전권을 박탈해버립니다.




그럼 이제 두번째 이야기. 현리전투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미리 조금 말씀드리자면, 아직까지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얘기는 조금 부정적인 것만 부각된 것도 있고, 

시간이 갈수록 반론도 어느정도 구색을 갖추고 있으므로 두개를 다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부제 : 6.25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 패퇴한 결정적인 이유 ( 좀 길지만... 재밌습니다 )


부정적인 면만 부각된 떡밥 더보기<<<<<<

딴지일보 펌 : http://www.ddanzi.com/index.php?mid=free&bm=best&m=1&document_srl=85761138




어쨋든, 현리 전투에 대해 알아봅시다 ㅜㅜ ( 이것도 무지무지 깁니다 )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한국군 네 개 사단을 삼중으로 싸먹어 완전히 결딴을 내고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5사단과 7사단은 막 밀려나고 연대가 통째로 날아가고 하면서도 완전 붕괴까진 안 되고 물러서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이 와중에도 중공군의 선두 부대는 산을 타고 내달려 오마치 고개에 도달합니다.


중공군 역시 오마치 고개를 잡으면 국군 3군단의 목줄을 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한밤중에 산을 타고 30km를 돌파한 끝에 5월 17일 새벽에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옆 동네 7사단의 방어선이 뻥 뚫리고 오마치 고개도 차단당한 사실을 안 9사단장 최석 장군은 포위를 우려해 휘하 부대들에게 후퇴 지시를 내렸고,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후퇴 지시를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3사단과 9사단은 전력을 온존히 보존한 채 현리로 모여들게 됩니다.


여기에 3사단 병력까지 모여들고 5월 17일 정오 무렵엔 3군단 대부분이 현리에 모입니다. 거기다 옆동네 7사단의 일부 패잔병까지 이곳으로 오면서 현리 일대엔 대혼잡이 벌어졌고, 좁은 지역에 부대가 왕창 모이는 바람에 무전기 전파도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지휘망까지 더 엉망이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재흥 장군이 연락기를 타고 군단 본부로 돌아가자 이를 본 장병들 사이엔 3군단장이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합니다.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기 위해 준비중이던 병력이 18연대와 30연대였는데, 여기서부터 뭐라 말로 표현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대강 관련자들의 증언을 추려보면,

18연대 장병들의 말 -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30연대 병력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현리에 있던 병력이 전부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그 상태론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30연대 장병들의 말 - 우리는 애초에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란 명령을 받은 일 없다. 사단 후퇴를 엄호하란 명령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연대 본부와 연락이 안 되어서 찾아가 보니 연대 본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30연대장의 말 - 사단장으로부터 오마치 공격 명령을 받아 휘하 대대에 작전 명령을 내렸는데, 무선 불통이 일어나고 대대에 연락을 하려고 해도 연락이 안 되었다. 사단 본부를 찾으니 사단 본부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9사단장 최석 장군의 말 - 9사단에 돌파임무를 준 것에 대하여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러나 돌파하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뭔가 증언들이 서로 책임 회피하는 것 같지만, 어찌되었든 한두 사람이 슬슬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현리에 있던 전 인원이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앞서 적었지만 이 직전 상황까지도 3군단은 병력부터 장비까지 멀쩡했으며, 오마치에 대한 제대로 된 돌파 시도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고,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현리에 있는 병력에게 제대로 공격을 가한 일도 없었습니다만,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현리에 있던 한국 육군 전 병력은 병사부터 장군까지 한순간에 부대 체계고 뭐고 없는 채로 산속으로 도망치면서 수만 명의 낙오병으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3군단에 대한 3중 포위망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중공군 81사단이 오마치 남쪽 5km 침교를 17일 오후 탈취, 이중포위망을 완성했다는 자료를 공개하면서 이 시각은 급격히 설득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군 3군단의 전력으로는 오마치에 이어 침교를 돌파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며, 침교 방향 돌파가 가능할 정도의 전력이었으면 당시 3사단장 김종오 준장이 거부한 사주방어 역시 가능했다고 합니다.


3군단의 돌파 시도가 예정대로 실시되었다면 오마치 고개의 중공군은 한국군에 적당한 피해를 입히고 돌파당해주는 척 하다가 침교에서 한국군을 돈좌시킨 뒤 다시 오마치를 차단, 3군단을 포위섬멸했을 것이라는 게 최근의 정설이다. 중공군 종군기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침교를 차단한 시점에서 중공군은 3군단 예하 3, 9사단을 모두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돌파가 실패하고 그 뒤 3군단이 방대산 방면으로 분산, 궤주한 탓에 전과가 추정 살상 및 포로 도합 5,000명 안팎에 그치자 "상상 밖" 이었다고 회상하면서 허탈함을 드러냈다.


결국 3군단의 부족한 훈련과 무질서한 와해가 3군단을 대참사에서 구해낸 것이다. 엉망진창으로 삽질을 해댄 탓에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던 셈인데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 인생살이 새옹지마 라는 말이 딱 맞네요 )


낙오병인지 패잔병인지 하여간 나흘만에 70km를 도망치면서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일보직전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하진부리에서 3군단 예하 3, 9사단 병력은 5월 20일까지 37%를 수습하게 되고, 대포 등 중장비는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8군에서는 3군단에 더 이상 밀려나지 말고 현 방어선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3군단은 하진부리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게됩니다만, 이들이 또 다시 밀려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21일이 되자 3군단 병력은 또 다시 패주하게 됩니다. 


결국 이 상황에 격분한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 해체를 명령하게 됩니다. 현리에서의 패배가 3군단 해체의 원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리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로 군단이 해체된 건 아니고, 하진부리 일대에서 또 다시 어이 없이 붕괴되는 3군단의 상황을 목도하고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 해체를 결심하게 한 것이죠.


(삽질한데 또 삽질을 하는 걸 봤다 이거죠.... )


 어쨋든, 이 시점에서 육군본부는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박탈당하고 이후로는 후방지원업무만 담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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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부분이 6.25 전쟁 부분입니다. 여러가지 특성이 한데 어우러진 전쟁이기 때문이죠.

언젠가 6.25 전쟁의 의미에 대해 글을 파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4줄요약


1. 아무것도 안했든데 군단이 와해. 순식간에 낙오그룹 생성

2. 덕분에 미군은 개고생

3. 그래도 다시한번 믿고 방어를 맡김

4. 역시 안됨. 개삽질. 작전권 완전 박탈



다음에는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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